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도 라테크 (문단 편집) == 지도자 경력 == [[파일:external/p5.focus.de/Karl-Heinz-Rummenigge.jpg|width=500]] '''[[바이에른 뮌헨]] 감독시절 [[칼 하인츠 루메니게]]와 함께''' 1965년 독일 축구협회와 계약을 맺고 독일 청소년 팀을 맡았고 동시에 [[데트마어 크라머]]와 더불어 당시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[[헬무트 쇤]]을 보좌하는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독일 대표팀의 [[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]] 준우승을 이끌었다. 1970년까지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를 맡은 우도 라테크는 1970년 [[프란츠 베켄바워]]의 추천을 받아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으로 임명된다. 선수시절에도 무명이었고 5년 동안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은 것 외에는 지도자 경력이 전무하여 논란이 있었으나 베켄바워같은 에이스의 추천이 있었고 게다가 당시 우도 라테크의 나이는 35살로 선수들과 그리 나이차이가 많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선수들의 단합에 큰 도움이 되었다. [[프란츠 베켄바워]], [[제프 마이어]], [[한스-게오르그 슈바르첸벡]], [[파울 브라이트너]], [[울리 회네스]]와 [[게르트 뮐러]] 같은 명 선수들을 지도하여 5시즌 동안 [[분데스리가]] 3회 연속 우승, [[DFB 포칼]] 1회 우승, [[UEFA 챔피언스리그|유러피언컵]] 1회 우승을 차지했다. 다만 이 시기에 우도 라테크는 선수빨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들었고 게다가 마지막 시즌인 1974/75 시즌 중간에 해고당한다. 그 뒤 임명된 감독이 베켄바워의 추천을 받은 [[데트마어 크라머]]. 그런데 사실 그 당시에 해고 당할 만도 한게 전 시즌인 1973/74 시즌에 리그 우승과 유로피언 컵을 우승했지만 정작 해당 시즌인 1974/75 시즌에는 성적 추락을 하였고 후임 감독인 데트마어 크라머가 그나마 성적을 끌어올린 것이 리그 10위일 정도로 74/75 시즌의 우도 라테크는 최악이었다. 우도 라테크의 해고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는데 1974/75 시즌 팀 성적이 추락하자 겨울 휴식기간에 우도 라테크 당시 바이에른 뮌헨 회장인 빌헬름 노이데커을 찾아가 그에게 '우리는 변화가 필요하다.'라고 하자 회장은 '맞아, 우리는 변화가 필요하지. 그래서 너는 해고야' 라고 대답과 함께 그 자리에서 바로 해고 당했다고 한다. [[파일:external/www.derwesten.de/0026841105-0055922895.jpg|width=400]] '''글라트바흐의 황금기, 좌로부터 [[울리 슈틸리케]], 우도 라테크, [[유프 하인케스]], [[베르티 포크츠]].''' 바이에른 뮌헨을 떠난 우도 라테크는 곧바로 [[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]]의 감독이었던 [[헤네스 바이스바일러]]의 후임 감독으로 임명된다. 묀헨글라트바흐에서 [[유프 하인케스]], [[알란 시몬센]], [[베르티 포크츠]], 라이너 본호프, [[울리 슈틸리케]], 헤르베르트 비머를 지도하며 1975/76 시즌에는 친정팀인 바이에른 뮌헨을 승점 4점차로, 1976/77 시즌에는 준우승팀인 샬케 04를 승점 1점차로 따돌리며 극적으로 리그 2연패에 성공하며 빌헬름 노이데커 회장에게 빅엿을 먹인다. 그 외에도 1976/77 유러피언컵 준우승, 1978/79 시즌에는 세르비아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상대로 유에파컵 우승을 차지한다. 유에파컵 우승 직후 우도 라테크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감독직을 사임한다. 2년 뒤인 1981년 [[엘레니오 에레라]] 감독의 후임으로 [[FC 바르셀로나]] 감독으로 임명된다. 하지만 그 시기는 [[바스크]] 구단인 [[레알 소시에다드]]와 [[아틀레틱 클럽]]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로 리그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, 1981/82 시즌 컵위너스컵 우승에 그치며 바르셀로나를 떠난다. 곧바로 1983년 이번에는 [[울리 회네스]]의 추천으로 [[FC 바이에른 뮌헨]]으로 컴백한다. 4시즌동안 [[칼 하인츠 루메니게]], [[로타어 마테우스]], [[파울 브라이트너]], [[클라우스 아우겐탈러]], [[롤란트 볼파르트]], [[디터 회네스]] 같은 선수들을 앞세워 3차례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1차례의 DFB 포칼 우승을 차지한다. 유럽 대항전에서는 1986/87 유로피언 컵 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[[FC 포르투]]에게 패하여 준우승에 머무른다. 준우승 직후 바이에른 뮌헨 감독직에서 물러난다. 그 이후 1991년 FC 쾰른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1경기만 지휘한 뒤 사임하였고 1992/93 시즌에는 6개월간 FC 샬케의 임시감독으로 임명되어 감독직을 수행하였다. 14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한 우도 라테크는 1993년, 지금 기준으로는 이른 나이인 58세에 은퇴를 선언하고 그 뒤 TV 해설과 신문 칼럼 등을 작성하는 일에 집중한다. 그러는 도중 2000년 당시 1999/2000 분데스리가에서 강등 위기에 처한 [[보루시아 도르트문트]]의 러브콜을 받고 임시 감독으로 임명되어 시즌 막판 5경기를 지휘한다. 당시 도르트문트는 강등권과 불과 1점차였는데, 5경기 동안 2승 2무 1패를 기록하며 도르트문트를 분데스리가에 잔류시키고 [[마티아스 자머]]에게 감독직을 물려준다. 그의 마지막 경기는 75,000명의 관중이 온 가운데 열린 헤르타 BSC 베를린과의 원정경기로 도르트문트의 3-0 승리였다. 2000년 도르트문트 임시 감독직을 지낸 이후 다시 TV해설, 신문 칼럼 등을 작성하다 2015년 1월 31일 새벽, 결국 숨을 거두었다. 죽기 직전까지 [[파킨슨병]]으로 인한 치매를 앓았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